#1
익산시 춘포면 학연마을, 친할머니댁이 있던 아버지 고향 마을 입니다.
당시 저희가족은 경남 양산에 살았었는데, 그래서 명절마다 아버지의 낡은 자가용을 타고 소백산맥을 넘는 그 먼 길을 오가고는 했었죠. 지금이야 내비게이션도 있고, 도착 몇 분 전이면 전화 한 통으로 다 알릴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고, 귀가 어두운 할머니에게 전화통화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전화가 연결되면 하실 말씀을 우다다 쏟아내고 그냥 끊어버리곤 하셨죠. 그러니 저희 가족이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 할머니는 알 방법이 없으셨을 겁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항상 마을 입구에 나와 계셨어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매번.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들손주며느리를 그저 '올 때가 됐다'는 감으로 마을 입구까지 나와 기다리셨던 겁니다. 얼마나 오래 서 계셨을지, 얼마나 많은 헛걸음을 하셨을지, 어린 저는 그냥 당연한 일인줄로만 알았죠.
돌이켜보면 그건 참 이상한 확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 하나로 매번 그 자리에 서 계셨던 거니까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때로는 어떤 데이터보다도 더 정확하게 무언가를 알아채는 것 같습니다.
학연마을이라는 농촌,
익산은 저에게 치과대학이라는 '학연'으로 얽힌 동네이지만, 그보다 먼저 '혈연'으로 이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익산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마을 입구에 서 계시던 할머니의 실루엣으로 먼저 떠오르는 도시입니다.
#2
그래서 제가 원광대학교 치과대학에 합격했을 때, 할머니가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연세치대 못간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할머니에게는 손자가 가까이 온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기쁜 일이었을 텐데, 당시 저는 익산이 어떤 동네인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다니게 된 학교가 그곳에 있었을 뿐이었죠. 여느 동기들과 다를바 없이 학교와 자취방을 오가고, 시험을 치르고, 밤 늦게까지 남아 보철 실습을 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같은 장소들이 익숙하기는 했지만 제 삶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저 치과대학 6년동안 잠시 머물다 당연히 떠나야하는 곳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때의 저는 할머니가 왜 그렇게 좋아하셨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제게는 ‘어느 치과대학에 합격했는가’가 중요했고, 할머니에게는 당신이 시집 와 평생을 살아온 익산이라는 곳으로 손자가 유학을 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겠지요.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금, 저 역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 작은 도시가, 하필이면 어린 시절 명절마다 할머니를 만나러 그 먼 길을 달려갔던 익산이었다는 것. 당시에는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던 그 우연이, 지금 돌아보면 참 묘하게 느껴집니다.
언제나 곧 떠날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버지 고향 동네가, 내 치과의사 인생이 시작된 곳이라는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