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각(復刻)'은
원형을 모방하여 다시 판각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흔한 것을 복각하지는 않는다.
그 오리지널이 귀하디 귀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일수록 '복각'은 의미가 있다.
오늘은 내가 가지고 있는
'라 레오나(La Leona)'라는 이름을 가진 특별한
기타 복각품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클래식 기타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때이다. 메마른 학창 시절에 단비와 같았던 잠깐의 휴식이였다.
의과대학 의예과 시절에도 기타를 놓지 않았던 것 같다.

1988년 문학의 밤. 찬조 출연
그 이후부터 의대 공부의 잔인함은 취미생활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그로부터 30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2018년은 개원 의사로서 잠깐 슬럼프에 빠진 해였다. 어쩌면 갱년기가 찾아왔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학창 시절이 그리워지면서 그때 잡았던 기타를 다시 잡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시작하게 된 클래식 기타.
다행히 병원 앞에 독일에서 공부하고 오신 선생님의 기타 학원이 있어, 진료가 끝난 저녁이면 기타를 등에 매고 레슨을 다녔다.
기타계의 체르니 교본이라 불리는 '카르카시 교본'을 어렵게, 그리고 지루하게, 배워 나가며 기초를 하나씩 익혀나갔다.
매일 진료가 끝나면 밤늦도록 진료실에 혼자 남아 기타줄을 퉁기며 연습했다. 그렇게 3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처음부터 목표가 있었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내가 사랑하는
'바흐'를 연주하고 싶다.'는........
이제 기본기는 끝났다.
꿈✨을 이룰 때다.
꿈을 향한 도전 .
제일 급한 건 가르쳐 줄 선생님을 찾는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서울음대를 졸업하시고, 오스트리아 와 독일에서 유학하신, 그리고 현재도 왕성한 연주를 하고 계신 '안용헌' 기타리스트에게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진료가 끝난 늦은 시간, 병원의 로비는 어느덧 , 젊은 선생님과 손이 뻣뻣한 나이 든 학생의 음악 스튜디오로 변한다.

바흐 바이올린소나타 2번 '안단테' (BWV1003)
이 한 장의 악보가 내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역시나 바흐는 '우주'였다.
1년간을 이 한 곡을 제대로 연주해 보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은...
내 손가락으로 '작은 우주'를 연주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비록 참고 들어줄 관객은 나 하나뿐인.)
목표를 하나 성취하니, 또 다른 욕심이 생긴다. 어쩌면 이젠 연습은 고통스러우니, 눈으로만 감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악기를 갖고 싶었다. 좋은 악기는 세워두고 바라보아도 왠지 선율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일본은 컬렉션의 나라이다... 모든 분야, 모든 취미에서 가히 경이로울 정도로 귀한 컬렉션이 많다. 기타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인 기타들이 일본 소장가들의 은밀한 개인 전시관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중에 가장 귀한 건,
기타 제작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안토니오 데 토레스"의 악기들이다.

안토니오 토레스(1817~1892)는 근대 클래식 기타 제작의 시초였으며, 현대 표준 기타의 원형을 제시하고 확립한 인물이다. 바이올린에 '스트라디바리우스' 가 있다면, 클래식 기타에는 '안토니오 토레스'라는 명장이 있다.
안토니오 토레스는 300대가 넘는 기타를 만들었으나 21세기 이후에도 남아있는 기타는 100대 남짓이고, 실제로 연주가 가능한 기타로 한정하면 더더욱 적어진다. 그래서 고유번호를 부여하여 문화적 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다. 현재 경매에서 거래도 안되지만, 수십억 원의 가치로 평가된다.
이 중에 특별히 더 가치 있는 악기는 토레스 가 가장 먼저 제작한 '라 레오나 La Leona (FE-04)'라는 기타이다.

기타 전문잡지 Orfeo Magazine 발췌
라 레오나 모델은 1856년에 제작된 악기로 로맨틱 기타에서 모던 클래식 기타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악기로 평가된다.
기타 제작 관점에서 몇 가지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토르나보츠(Tornavoz)라는 장치가 부착된 것이 특징이다.

토르나보츠(Tornavoz)는 사운드홀 안쪽에 장착된 나팔 형태의 황동 공명관으로, 이 구조를 통해 깊고 안정적인 저음을 자연스럽게 증폭할 수 있으며,
특히, 황동이라는 금속 특유의 공진 특성으로 목재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독특한 울림을 표현한다.
라 레오나는 '암사자'라는 뜻이다.... 토레스가 만든 기타 중 유일하게 이름이 있다.
이름은 암사자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수사자의 풍성하고 위엄 있는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
현재 La Leona는 독일의 개인 소장가인 Erhard Hannen이 소유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인 Wulfin Lieske가 이 귀한 악기를 대여받아서 연주하고 있다.

Wulfin Lieske
그리고 이런 기념비적 모델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은, 소박한 소장가에게는 '복각'이라는 기회가 주어진다.
원본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연구하여 그 구조의 신비를 다시 한번 재현해 내는 복제 악기이다.

Orfeo Magazine 발췌
몇 명의 현대 기타 제작가들이 이 아름다운 예술품을 복각으로 재탄생 시켰는데,
토레스의 복각 기타를
관심 있게 찾아보던 나는 드디어.....
카를로스 후안 부스 키엘 이라는 스페인 발렌시아기타 제작가의 복각 품을 구할 수 있었다.


얼마나 좋던지 ~

기타의 울림은 다른 악기의 소리와 사뭇 다르다.
바이올린의 경우 '활'이라는 중간 도구를 이용하여 줄에 마찰을 일으켜 소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클래식 기타는 내 몸의 일부인 손톱 을 이용해서 직접 줄을 튕기며 (탄현) 소리를 만들어내니, 훨씬 '원시적'이며 음량은 작지만 청명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런 섬세하고 맑은 기타 소리가 좋다.
특히 라 레오나의 토르나보츠(황동관)을 통해 울려 나오는 소리는 마치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메아리 소리처럼 깊고 맑다.
라 레오나는 독특한 목재로 만들어졌다.
전판은 밝은 색상의 '스푸러스 (Spruce):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고, 이 목재는 기타 제작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나무이다.
그런데 후판은 좀 특별하다. 현대 기타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매우 밝은 색상의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를 사용하였다.
사이프러스는 이태리나 스페인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이다.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 1889.
특별히 라 레오나에는 이 사이프러스 나무를 세 조각으로 이어 붙여 만들었다.

이렇게 얇은 real wood로 만들어진 섬세한 악기는 관리가 매우 까다롭다.
습도 관리가 매우 중요한데, 특히나 건조한 겨울철에 메마르거나 갈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진료실은 물론 기타를 보관하는 케이스에도 습도계를 장착하여 체크하고 있다.

피부과 의사인 나는 이럴 때마다
우리의 인간의 피부와
너무도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늦가을이 되어 기타의 매끄러운 나뭇결이 어느덧 메말라 가는 것을 느낄 때면, 나는 '암사자 레오나'에게 특별한 처방을 내린다.
휴미디팩.

기타에 넣어두면, 악기 케이스 내부의 습도를 최적의 상태(45~55%)로 유지시켜 주는 습도조절 팩이다.
그리고 진료를 보듯이 매일 꺼내어 상태를 관찰 하고, 수시로 습도를 체크하며 가장 좋은 환경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피부과 의사에게는
이런 섬세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이미 생명활동이 정지된 목재로 이루어진 악기를 해서도 이렇게 귀 기울여주고, 섬세하게 살펴주어야 하거늘

Orfeo Magazine 발췌
1조 이상의 살아 숨 쉬는 세포들로 이루어진 인체의
피부에는 얼마나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오늘도 기타라는 악기의 따뜻하고 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피부와 같이 매끄러운 나뭇결을 보듬어 보면서,
나의 섬세함을 단련한다.

그리고 그 섬세함으로 진료하고 치료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찾아오시는 환자분들 한 분 한 분은,
복각품이 절대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완벽하고도 유니크한
아름다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p.s. : 이 블로그를 쓸 즈음, 바쁘다는 핑계로 연습에 게을러졌음을 고백한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래... 다시 연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