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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 - "뜨겁게 타오르는 시칠리아의 햇살 속으로" - 김영하/복복서가

서울재생치과의원 신촌본원 · 신촌 치아지킴희 전준희

오래 준비해온 대답 저자 김영하 출판 복복서가 발매 2020.04.29. ​ ​ 2008년의 시칠리아 여행기이다.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판매되기 직전 해이다. 나도 저 시기에 유럽에 머물렀던 터라 작가님과 약간의 내적 유대감이 생겼다. 인터넷 연결이 안되는 초저가형 노키아 피쳐폰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주말이나 짧은 방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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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

저자 김영하 출판 복복서가 발매 202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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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시칠리아 여행기이다.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판매되기 직전 해이다.

나도 저 시기에 유럽에 머물렀던 터라 작가님과 약간의 내적 유대감이 생겼다.

인터넷 연결이 안되는 초저가형 노키아 피쳐폰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주말이나 짧은 방학을 맞이하여 이웃나라로 여행을 갈 일이 있으면 여행 카페와 인터넷 사이트에서 채집한 정보를 A4 용지에 빼곡히 적어서 가방에 넣어다니곤 했다. 현실이 인터넷에 반영되는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A4 용지를 채워간들 늘 현지에서는 한 두 가지쯤 계획대로 되지 않곤 했다. 그럴 때 마다 현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는데, 누구나 흔쾌히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의 친절을 베풀어주곤 했다.

도시마다 대표적인 지도책이 있었다. 도시인들도 가방 속에 넣어다니는 작은 포켓북 같은 것이었는데, 런던에서는 런던AtoZ가 가장 유명했다. 런던에서 내가 길을 물어본 어떤 여성도 핸드백에서 손바닥만한 그 지도책을 끄집어 내어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그 땐 정말 어렸고, 겁이 없었다. 남에게 도움받고 도움주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생전 처음 가는 도시에 떨어졌어도 곧잘 친구를 만들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현지인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없어졌다. 대중교통이나 시내에서 마주치는 이방인에게 미소를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10년 후 다시 찾은 그 곳은 서울의 삭막함을 닮아가고 있었고, 그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작가님의 시선을 따라 오르티자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죽비로 내려치기라도 한 듯'한 날카롭고 뜨거운 햇살의 광선을 맞는다.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그림자를 뒤로한 채 가슴까지 내려오는 사선의 햇살을 훈장처럼 가슴에 새겨본다. 작가님에게 시칠리아가 그러했듯, 나에게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도시가 있다. 긴 긴 코로나의 터널이 끝난 후 첫 번째 목적지를 묻는다면, 나도 조심스럽게 준비해온 대답을 꺼내보려한다.

p.17

스마트폰 이전 시대에 경험한 마지막 여행

p.18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젊었다, 그리고(아니 그래서),

겁이 없었다.

p.37

그리고 언제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손님들이 다녀간 빈자리에 남아 나는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내 내면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버스가 왔는데, 와서 모두들 그 버스를 타고 떠나는데, 나만 정류장에 남아 있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저 버스에 타고 떠나야 하는데, 타고 떠나버려야 하는데 그러나 나는 정류장에 남아 있는 대가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

p.42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된다.

p.44

생각해보면 모든 게 '어느새' 그렇게 돼 있었다. 이런 '어느새'에는 어떤 값싼 자기도취가 있고 그 안에 오래 머물고 싶은 달콤한 유혹이 있다. (...) 어느새 나는 그렇게 돼 있었다.

p.47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내 서가의 책들에도 그런 기준을 적용했다. 나를 감동시켰거나 즐겁게 해주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책들은 살아남았다. 그 세 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 집을 떠났다.

p.50

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이 모든 것들,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사항들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을 정말이지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p.51

나는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 사들인, '너무 오래 존재하는 것들'과 결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서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시냇물이 그러하듯 잠시 머물다 다시 제 길을 찾아 흘러가는 삶. 음악이, 영화가, 소설이, 내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가는 삶.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p.99

술은 가능하면 언제나 그 지역의 것을 먹는다는 게 내 원칙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라는 책에서 하루키는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는 더 멋진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p.114

내가 다닌 대학에도 75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잇는 큼지막한 반원형극장이 있다. 소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멀리 신촌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던 이 극장을 우리는 노천극장이라고 불렀는데 그곳에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응원 연습 같은 학교의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우리는 모두 그 극장을 사랑했다. 노래를 부르면 서로 잘 들렸고 함성을 지르면 서로의 가슴으로 울렸다. 무엇보다 그 극장에 모여 있노라면 우리가 비슷한 사상과 지향을 가진 동질적 집단이라는 확신이 절로 들곤 했다(물론 졸업을 하면서 그런 믿음은 빠르게 줄어든다).

p.116

그럴 때 여행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p.276

6월의 시라쿠사를 돌아다니다보면 누군가 죽비로 내려치기라도 한 듯 번쩍, 카라바조를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좁은 골목 사이로 다투어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은 카메라의 자동 노출계마더 무력화시킨다. 안전한 성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무질러하게 지은 집들 때문에 오르티자에서 골목이란 말 그대로 골목이다. 팔을 흔들며 걸어다니면 팔꿈치가 벽에 부딪칠 것만 같다. 그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은 여간해선 인물의 전신을 비추지 못한다. 그렇다고 광량이 약하거나 희미한 것은 아니다. 퇴락한 바로크풍 건물들 사이를 뚫고 내리꽂히는 이 무시무시한 빛은 인물의 세부, 이를테면 이마나 어깨, 볼이나 목을 강렬하게 비춘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춘다. 빛이 예리한 작살처럼 사물을 꿰뚫는 곳, 그곳이 오르티자다.

p.361

"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사람?"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아내는 정말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걱정을 해놓아야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는 것 같다."

"이렇게 사는 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종일 얘기하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p.373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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