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진료실에서 환자분들께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선생님, 이 탈모약... 평생 먹어야 하나요?”
이 질문을 받을 때면 저는 잠깐 연기력이 발동합니다.
마치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짝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죠.
“그렇게 비장하게 생각하시면... 오히려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곤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냥 머리카락에 신경 안 쓸 때까지만 드신다고 생각하세요.
사실 저도 하루하루 먹다 보니 벌써 20년이 지났네요.”
이 말을 들은 환자분들 대부분은 깜짝 놀라십니다.
“스무 해요? 매일이요? 한 번도 안 빠뜨리고요?”
물론 빠뜨린 날도 있었습니다. 사람인데요.
술 마신 다음 날, 해외 출장 중 시차에 적응 못했을 때, 여행 가서 약통을 깜빡했을 때 등등.
하지만 그런 날이 있었기에 오히려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다시 복용할 수 있었습니다.
약을 하루 빠뜨린 걸 큰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꾸준히 복용할 수 있었던 거죠.
예전에 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깨가 거의 김종국처럼 벌어져 있었는데요,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장에 가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 해?”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하는 거야.
오늘 하기 싫으면 내일 쉬지 뭐,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다음 날 되면 또 하게 되더라고.”
그 말이 마음 깊숙이 박혔습니다.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부담을 만들고, ‘언제든 멈춰도 된다’는 여유는 오히려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 되니까요.
심리학 실험 하나가 떠오릅니다.
참가자들에게 같은 비디오를 보여주고, 절반에겐 “이걸 잘 기억하세요”,
나머지 절반에겐 “이건 기억하지 마세요”라고 지시했습니다.
놀랍게도 ‘기억하지 마세요’ 그룹이 오히려 내용을 더 잘 기억했습니다.
이런 반응을 ‘심리적 반발(Psychological Reactance)’이라고 합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하면 오히려 도망치고 싶어지는 심리 반응이죠.
탈모약 복용도 그렇습니다.
‘평생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갑자기 무겁고 지루해집니다.
하지만 ‘귀찮으면 그만두지 뭐’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꾸준히 복용하게 되는 역설적인 효과가 생깁니다.
제 환자 중 한 분은 벌써 5년 넘게 약을 잘 복용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철학은 아주 단순합니다.
“머리카락 생각 안 나면 안 먹을 거예요. 근데 매일 거울 볼 때마다 생각나니까 계속 먹게 되네요.”
또 한 분은 여자친구의 한마디 때문에 약을 끊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 평생 먹을 거야?”라는 말을 들은 순간,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 들었다고요.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어야죠. ‘그럼 평생 머리카락 유지되겠네!’”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셨고, 결국 다시 약을 복용하기로 하셨습니다.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합니다.
스스로에게 무거운 책임을 부여하다가, 그 무게에 눌려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도 빠지면 안 돼’라는 다짐은 결국 그 일을 망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오늘은 그냥 먹는 거야.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저 역시 언젠가는 약을 그만둘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아니면 어쩌면 영영 안 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매일매일 제가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의무가 아니라 습관으로, 부담이 아니라 여유로 이어가는 것이니까요.
머리카락이든, 운동이든, 글쓰기든 뭐든 간에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생각이 우리를 계속하게 만듭니다.